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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를 지속적으로 간음하고 추행한 목사가 재판에 넘겨졌다. 목사는 "하느님을 대신하는 대행자" 행세를 하며, 장기간 피해자를 정신적으로 지배했다. 1심은 피고인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다. 피고인은 항소했고, 선고 일주일 전 5,200만 원을 형사공탁했다.

재판부는 공탁금을 놓고 고심했고, 결국 항소를 기각했다.

"사기죄와 같은 일반 재산범죄에서 부득이 피해자의 연락처나 인적사항을 알 수 없는 경우 피해자를 위하여 상당한 금액을 공탁하면 이를 양형에서 유리하게 고려할 수 있을 것임은 분명하나, 이 사건과 같은 성범죄에서 피해자가 합의를 완강히 거부할 경우 형사공탁을 하면 이를 과연 양형에 반영해야 하는 것인지, 한다면 얼마나 반영할 것인지 고민이다. 다만 상당한 형사공탁이 이루어진 경우를 아무런 사정 변경이 없는 경우와 같이 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피고인으로서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려는 노력조차 무시할 수는 없으므로 이러한 사정을 피고인에게 미약하나마 유리한 양형 요소로 추가하여 이 사건을 살핀다."
-서울중앙지법, 2022노000 판결문

그런가 하면 공탁이 적극 고려돼 항소심에서 극적인 반전이 이뤄지는 경우도 많다. 노래방에서 피해자를 끌어안고 입맞춤을 하는 등 강제적인 신체 접촉을 한 피고인이 1심에서 징역 1년 6개월 실형을 선고받았다.

피고인은 항소하고 선고 닷새 전 피해자 앞으로 500만 원을 공탁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피고인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피고인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형편에 있음에도 피해자를 위해 500만 원을 공탁하였고... "
-대전고법, 2022노000 판결문


성범죄 정보 공유 인터넷 카페에서는 공탁금과 관련된 글을 쉽게 볼 수 있다.
얼마를 공탁해야 감형받을 수 있을지를 묻는 질문이 끊이지 않지만, 섣불리 예측하기는 쉽지 않다. 피고인의 어려운 경제적 여건을 적극 고려해 500만 원으로 선처해주는 재판부가 있는가 하면, 아무리 거액을 공탁해도 피해자 의사나 죄질 등을 고려해 유의미한 감형 요소로 받아들이지 않는 재판부도 있다.

■ 공탁 = 상당한 피해 회복?

성범죄나 폭력, 살인 등 비재산범죄 양형기준에는 '상당한 피해 회복(공탁 포함)'이 감경 요인으로 명시되어 있지만, '상당한 피해 회복'이 무엇인지에 대한 별도의 정의 규정은 없다.

양형위는 이걸 법관의 '양형 재량권'이라고 설명했다.

대법원 양형위원회 :

상당한 피해 회복의 기준을 다양한 범죄에 걸쳐 일관되게 정하는 것이 어렵고, '사회 통념상 피해 회복의 상당성'을 법관으로 하여금 합리적인 양형 재량권 행사를 통하여 판단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기 때문입니다.
-11월 8일 KBS 질의사항 답변

법관의 '양형 재량권'은 전적으로 존중받아야 한다. 하지만 '양형 재량권'은 판결문에 쓰여진 '양형 이유'를 통해 사건 당사자와 국민을 납득시킬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피고인의 일방적 공탁을 근거로 감형하려면 이 공탁이 피해자의 '상당한 피해 회복'과 어떤 인과성을 갖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판결문을 받아든 피해자들은 한결같이 억울하고 궁금해했다.

양형위 역시 이 같은 비판을 알고 있다고 답변했다.

대법원 양형위원회:

공탁과 관련된 감경인자가 일선 재판에서 너무 쉽게 적용되고 있다는 비판이 있었던 것을 알고 있고, 그러한 지적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양형위원회는 향후 전문위원단의 연구·검토를 거쳐 공탁과 관련된 양형인자에 대한 추가 정비 방안을 심의하고, 이를 양형기준에 반영할 예정입니다.
-11월 8일 KBS 질의사항 답변

■ 피고인의 감형, 피해자의 고통

금전 보상으로 피해를 회복하려는 피해자의 의사는 존중받아야 한다. 문제는 이런 피해자들에게조차 '동의 없는 공탁'의 실익이 크지 않다는 점이다. 피해자가 원하면 공판 과정에서 합의금을 받을 수도 있고, 합의를 원치 않으면 유죄 확정 뒤 민사로 손해배상소송을 청구해 금전 보상을 받을 수 있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동의 없는 공탁이란 손해배상소송 뒤 어차피 피고인으로부터 받게 될 돈을 조금 더 신속하고 간편하게 받는다는 실익이 있을 뿐이다. 반면 피고인은 어차피 피해자에게 줘야할 돈을 조금 더 빨리 주는 방법으로 감형까지 받는 '이중의 실익'을 누린다는 지적이다.

일부 피해자들은 금전 보상 자체를 거부하기도 한다. 억만금이 생겨도 '그날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기에, 피고인이 마땅한 '죗값'을 받는 것만이 피해를 회복할 유일한 길이라고 믿는다. 이런 피해자들에게 피고인의 감형은 또 다른 고통일 뿐이다.

‘새로운 미래를 위한 청년변호사 모임’ 소속 김슬아 변호사, 형사공탁 특례 시행 초부터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해 왔다.
끝까지 혐의를 부인하며 사죄하지 않는 피고인이 피해자를 기만하듯 공탁하고 감형받을 때, '용서의 권리'를 빼앗긴 피해자들은 모멸감을 느낀다. 김슬아 변호사는 "법원이야말로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 "공탁 취지 변질"…법안 통과 전 이미 우려


개정 공탁법은 2020년 11월 국회를 통과했다. 논의 과정에서도 어느 정도의 부작용이 예견됐다.

법원행정처장: 피해자에 대한 인적사항 자체가 노출이 안 되고 열람 복사도 못 하기 때문에 변호인 입장에서는 합의는 물론이거니와 공탁이라도 하고 싶은데 못한다, 변호사 업계에서 요구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전주혜 국회의원: 저는 좀 의견이 다른데요. 피해자와의 합의나 피해자와의 금전적 사과 노력 없이 모든 사건에서 사건번호 쓰고 이런 식으로 공탁함으로써 공탁의 취지가 변질될 수도 있거든요.

-공탁법 개정안 국회 법안심사 소위 회의록(2020년 11월)

하지만 법안은 무난하게 통과됐다. 그나마 초안에는 법원 공탁관이 직접 피해자에게 공탁을 통지하도록 했지만, 논의 과정에서 인터넷에 공고하는 방식으로 수정 가결됐다. 피해자도 모르는 기습 공탁이 남발되는 단초가 됐다.


국회에는 공탁법과 관련한 두 건의 법안이 발의된 상태인데, 다시 초안으로 돌아가 법원이 직접 피공탁자나 대리인에게 공탁 사실을 알리도록 하는 안과, 변론종결 기일 14일 전까지만 형사공탁을 할 수 있도로 하는 등의 방식으로 '기습 공탁'을 막는 게 핵심이다.

■ 인공지능이 판결을 대신할 수 없다면

전문가들은 양형 판단 전 공탁에 대한 피해자 의사를 반드시 확인하는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피해 회복의 당사자를 배제한 채 피해 회복의 결정권을 재판부가 독점하는 현 상황이 이어진다면 사법부에 대한 신뢰도 흔들릴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탄희 의원은 피해자가 공탁에 대해 충분히 의사를 밝힐 수 있는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한다.
"판결을 인공지능으로 대체하라"는 분노의 목소리가 넘쳐난다.

인공지능으로 법리와 판례를 정밀하게 대입해 유무죄를 가릴 수 있게 된다 한들, 죄의 본질을 따져 '죗값'을 매기는 양형 판단의 최종적인 책임은 사람인 법관의 몫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피고인이 범죄에 이르게 된 구체적 정황과 피해자가 받았을 고통을 두루 섬세하게 살필 수 능력은 결국 사람에게서 올 것이라는 믿음, 그 바탕 위에서 우리 사회는 법관들에게 '양형 재량권'을 부여했다.

'동의없는 공탁'처럼 명백한 부작용마저 개선되지 않는다면, 양형재량권의 근거가 될 그 믿음도 유지되기 어려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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